미국 대학에서 교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노력들
어디서든 파워의 불균형이 있으면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직장에서는 직급에 따른 상사와 부하 관계가 있고, 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관계가 그렇다. 상사는 부하의 성과를 평가하기 때문에 더 많은 파워를 가지고, 교수는 학생의 성적을 결정하기 때문에 더 많은 파워를 가진다.
문제는 내가 하는 일이 상대방의 일이나 학업을 평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를 이용해 다른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일에서만 상하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모두 평등한 관계이다. 만약 그 자리를 이용해 일 이외의 부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월권행위이고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호감 가서 그랬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행동으로 강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의 변명거리조차 안 되는 폭력적인 말이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서로 좋아하는 관계였다'라는 가정은 상하 관계에서 위험하다. 확실한 동의가 있지 않는 한 그 호감은 일방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평가받는 사람은 평가하는 사람에 비해서 파워가 약할 수밖에 없고, 평가하는 사람의 요구에 휘둘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이 교수들의 계속되는 성희롱, 성폭력에도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떠한 불이익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수업을 듣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수업의 성적이 안 좋게 나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수업을 듣고 있는 않은 상황이라면 나이와 사회에서의 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위압감에 눌러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파워가 있는 사람들일수록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와 닿을지 생각하고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그 자리에 마땅히 따르는 책임이다.
미국에서도 성폭력 사례가 꽤 많기 때문에 각종 기관이나 학교에서도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규칙을 세우고 상담기구를 운영한다.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교수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성폭력 방지 노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먼저, 학업계획서에 성폭력 - 성희롱,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 어떠한 경우의 성차별 - 관련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명과 전화번호, 홈페이지, 학교 학칙 페이지를 의무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성폭력과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를 듣는 다면 무조건 관련 기관에 알려야 한다.
둘째, 매년 의무적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sexual misconduct 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Affirmative Consent라는 개념이었다. 인식이 제대로 있는 상태에서의 자발적인 상호 동의를 말한다. 이러한 affirmative consent가 있었을 경우에만 성적행위가 성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저항이 없다고 해서 동의가 아니며, 침묵 또한 동의라고 말할 수 없다. 강압, 협박이나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의 자발적인 동의만이 affirmative consent이다.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의 절반 정도가 겁에 질려 몸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저항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극한 공포에 질렸을 때 자동적으로 몸이 굳게 되고 근육의 마비가 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동의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 처음에 동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혹은 행위 중에라도 취소될 수 있는 것이다. 행위 중에 동의가 취소되면 그 즉시 성적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하나의 성적행위에 동의했다고 해서 다른 성적행위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니다. 즉, 포옹이 허락되었다고 해서 키스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키스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신체의 일부분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난번에 동의를 했다고 해서 지금도 동의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애매모호한 동의는 동의가 아니다. 콘돔이나 다른 피임 방법을 쓰라고 요구하는 것은 affirmative consent가 될 수 없다. 오직, 그 특정한 성적 행위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긍정적인 동의를 확실한 단어로 전할 때에만 affirmative consent이다.
술에 취했을 때의 동의는 affirmative consent가 아니다. 술 취한 상태에서는 상황 인식이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 확실한 동의가 있지 않았을 경우에는 술 취한 상태에서의 성적 행위는 성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Affirmative Consent에 대한 정의
나도 일반 상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성 관련 교육이 필요할까 라고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건 내 오만이었다. 생각보다 무지했고, 완전한 동의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부끄럽게도 퀴즈를 많이 틀렸다. 그래서 모두들 이렇게 일 년에 3-4시간씩 꼭 교육을 받아야 하는구나 싶었다.
그 외에 내가 따로 노력하고 있는 부분은,
수업을 시작하고 본격적인 티칭에 들어가기 전에 최근 기사에 대해서 5분에서 10분 정도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종종 미국에서의 미투 운동, Harvey Weistein, Bill Cosby 등 직접적인 성폭력 사례, Uber의 sexual assualt 스캔들 관련 기사들을 언급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물어보곤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학생들이라 더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있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에 한 곳이다), 그 기업들이나 유명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남녀 학생 가릴 것 없이 강력하게 잘못을 규탄하는 모습을 보여서 기분 좋게 놀라곤 한다.
또, 학생들이 내 오피스에 올 때면 항상 문을 열어두고 상담을 진행하고, 악수나 하이파이브 등 손과 손이 마주 닿는 터치 이상은 하지 않는다.
꾸준한 성폭력 인식 교육으로 미국이건 한국이건 어느 나라에서건 성폭력이 최소한 학내에서 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